
본명 : 이훤
시호 : 사도 - 사후 영조가 내림
/ 장헌 - 정조가 올림 즉, 사도장헌세자
영조는 첫째였던 효장세자가 요절한 이후
아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후궁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훤(사도세자)을 얻는다
너무 기뻐한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실이었던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 후 원자로 천명한다
이듬해 영조 12년 이제 갓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
세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컸던 영조는 세자가 읽을 책을
직접 밤을 새워 필사하였고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여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총명함에 자주 매료 되었는데
4달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만에 아비 영조의 부름에 대답 하였으며
7달만에 동서남북을 분간,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내었고
5살엔 밥을 먹던 중 영조가 말을 걸자
입안에 있던 밥을 전부 뱉고 답 한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에 영조가 어찌 음식을 뱉었는가 물으니
세자는 "소학에서 부모가 부르실 때는 입에 있는 걸
뱉고 말하는게 효라고 배웠습니다" 라고 답한다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총명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조도 어린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 번씩 직접 안아보게도 하고
세자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게 하는 등 세자를 무척이나 총애했다고 한다.
왕과 세자간의 관계에서 시작된 영조의 잘못 된 판단은
100일도 안된 세자를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뜨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선의왕후(경종 비)가 생전에 기거하던
저승전에 머물게 한 것인데
경종과 선의왕후를 모시던 궁녀들에게 세자 시중을 맡긴 것
영조 입장에선 선왕을 모시던 궁인들이 세자를 보위하면
세자의 권위도 올려주면서 경종 독살설로부터도 벗어나는
자신의 정당성을 찾기위한 정무적 판단으로 읽힌다.
추후 혜경궁 홍씨(세자 빈-사도세자의 부인, 정조의 생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저승전의 최고참 격이던
최상궁과 한상궁이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를 업신여기며
세자를 만나는 것을 자주 훼방 놓았다고 적혀있다.
영빈이씨는 출신이 미천했고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 눈에 들어
영조의 후궁이 된다.
실제 왕실에서도 친모인 영빈 이씨보다 양자로 입적 된
영조의 정실 정성왕후의 세자라는 점이
궁 내의 영빈 이씨와 사도세자간의
관계를 떨어뜨려놓게 된 것
또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세자가 7세가 되던 해에 영조는
셀수 없이 많던 한상궁의 심술들을 알게 되어
한상궁을 쫒아냈으나
최상궁 등 그전 내인들은 그대로 사도세자를 돌보게 한다

혜경궁 홍씨 작성 한중록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시작은
대리청정을 맡긴 15세 전후다
그전까지 높았던 기대탓에 질책도 많았지만
칭찬도 아끼지 않으며 아들을 매우 아꼈다
14세 즈음 이르러 혹독하게 대하며
엄히 질책하는 일이 많아지자
세자는 점차 아버지를 꺼리게 된다
한중록의 일부
두 부자분 성품이 몹시 달랐다.
영묘(영조)께서는 똑똑하고 인자하며 효성스러웠다.
모든 일을 자상하게 살피며 민첩하고 숙달된 성품이었다.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말씀이 없고 행동이 민첩하지는 않았지만 덕량이 거룩했다
모든 일에 부왕의 성품과 달랐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났을 때 많은 신하들 앞에서
사도세자에게 가차없이 화를 냈는데,
자신의 답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말지 걱정하는 성품이니
영조의 이런 태도는 사도세자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후에 사도세자가 영조를 얼마나 무서워하게 되었냐면,
사도세자가 20대 초반일 때
정성왕후 서씨가 병환이 깊어지자
병수발을 직접 들러온 세자가
정성왕후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통곡하던 와중에도
영조가 온 것을 보자마자
울음이 뚝 그치고 겁에 질려 방 한구석에 복대하고
벌벌 떨었다고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조 본인부터 감정 기복이 심하고
심하게 화가 난 경우 기록할 수 없는 발언을 했다고
기록된 왕이었는데,
지속적으로 꾸짖음에 노출되어
아버지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던 사도세자는
아는 것도 우물쭈물해서 잘 대답하지 못한다.
영조는 14살 전후부터는
이런 세자를 타이르기보다는 강하게 꾸짖기만 했고
이때문에 영조를 더 두려워하게 되어
답변이나 상황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744년 영조는 10살의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라고 묻는다.
세자는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 라고 답한다.
이에 영조는 "네가 진실하게 말을 했으니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필사적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신하들도 압도하곤 했던 영조의 속마음은
이런 세자의 성격과 학문 성취의 미흡함이
당연히 못마땅했을 것이다.
또한 10살 전후로 학업이 태만해졌다고
승정원일기에 적혀있으며
영조의 측근이었던 조현명은
사도세자가 고조부인 효종과 닮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효종은 학식이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무예로 유명했다
- 대리청정부터 시작된 영조의 히스테리
-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다 툭하면 발하는 양위파동
- 영조 본인과 사도세자간의 기질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결국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죽게 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여기엔 작중, 역사적 사실로 알려진 바와 같이
유일한 우군이었던 대왕대비 인원왕후의 서거로
사도세자의 심리적, 신체적 약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나오는 만조상해원경은 본이름은 옥추경으로
조상의 원혼을 달래거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해탈 시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곡이다
작중에선 본인의 집안의 유일한 우군이었던
대왕대비의 초상화 앞에서 경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https://youtu.be/uz4-jpKVpoA?si=QyprgYmzx0VQCKQi\
실제로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따르면
경모궁(세자)께서는
매양 경문 잡설붙이 보시기를 심히 하셨다
. "옥추경을 읽고 공부하면 귀신을 부린다 하니 읽어보자"
하시며 밤마다 읽고 공부하시더니,
과연 심야에 정신이 어득하셔서
"뇌성보화천존이 뵌다" 하시고 "무서워, 무서워" 하시며,
병환이 깊이 드시니 원통하고 섧도다.
10여 세부터 병증이 계셔서 음식 잡숫는 것이나
다른 행동거지가 다 예사롭지 않으시더니,
'옥추경'을 보신 이후 아주 기질이 바뀌셨다.
심지어 '옥추' 두 자를 감히 말하지 못하셨다.
단옷날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주는
옥추단(급체 등에 쓰는 구급약)도,
옥추라는 이름이 무서워 받질 못하셨다.
그 후로는 하늘도 무서워하시고,
우레 뢰(雷), 벽력 벽(霹) 같은 글자는 보지도 못하시니라
라고 쓰여있다

사도세자 상상 어진
.
'생활정보 바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늘(3월 4일) 부터 시작하는 봄날 맞이 스타벅스 음료와 푸드 신메뉴 ..... (0) | 2026.03.04 |
|---|---|
|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독립 운동가는 누구인지 알고 계시나요? ..... (0) | 2026.03.04 |
| 2026 미슐랭 빕구르망 추가된 식당들 ..... 합리적 가격과 훌륭한 맛 제공 (0) | 2026.03.03 |
|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여행 소비 방식이 바뀌고 있다 ..... 무비자 입국 (0) | 2026.03.03 |
| 당신은 독을 먹고 있나요? ..... 과당은 건강 상 문제를 더 많이 일으킨다 (0) | 2026.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