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보따리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

딸랑이* 2023. 5. 18. 08:35
728x90
반응형

 

중3이었습니다.

2학년 때 부터 해 왔던 학교 선도부의 부장을 맡고 있었어요.

지도교사는 기술과목을 담당하시던 X영수 선생님.

 

5월 중순에 집안 기제사가 있다고, 토요일(그 때는 일요일만 쉬는 날이었지요.) 하루 휴가내시고

광주 다녀오겠다고, 금요일 오후에 저를 불러서는 토요일 등교지도 잘 하라고 그러시더군요. 

 

월요일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화요일도 수요일도.

그 주 내내. 

 

그리고 당시 한자를 모르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국한문 혼용체였던 신문에는

광주, 폭도, 불온세력, 난동, 진압.....이런 제하의 글들이 수두룩히 올라왔지요. 

그 때는 한자 및 한문수업이 필수과목이라, 그나마 조금씩은 읽을 수 있었고,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찾아보며 기사들을 읽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제게도 의문이 가는 지점이 떠오르더군요.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있을 때라 대놓고 쓰지는 못했겠지만,

'광주 시내에서는 이러저러한 소문도 떠돈다....'는 식으로 써 올린 기사들.

잔인하기 이를 데 없고, '이건 적을 상대로도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까....'하는 행동을

진압군 (특히 공수부대)가 했다는 '풍문'이 떠돈다는 기사들.

 

근데, 희한한 건, 그 풍문이 너무 사실적이고 자세하게 기사에 묘사된 것이었습니다. 

 

중3의 머리에도, 풍문이나 소문이 이렇게 자세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정말 세세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글들이었어요. 

 

하지만, 진실을 알 수 없었지요. 

폭도, 불순세력, 무장봉기.....이런 말들이 너무 대량으로 강력하게 쏟아지고 있었으니....

 

2주 정도 어쩌면 10일 정도 지나서인가....

선도부 지도교사인 X영수 선생님은 다시 출근을 하셨어요.

그리고, 그냥 '참 힘들었다.'는 말 한마디 이외엔 

광주에서 겪은 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같은 학생들에게도, 주변 동료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경험들을 하셨던 거라 생각합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갑종으로 군 생활하시다가 결국 별을 달지 못하셨던 아버지의 희망을 제 희망으로 착각하고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서 별을 달아볼 꿈을 꿨었습니다. 

 

그러다가, 고 3때

우연히 '광주사태'(그 때는 그렇게 불리웠으니까요.)의 단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인으로 사는 게 옳은 것인가....하는 회의가 어린 마음에도 몰아치더군요.

10월 초인가....육사 1차 필기시험을 치러 가서, 

시험지를 딱 받아드는데,

그 순간, 이 길은 내가 가서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국어는 자신 있었고, 영수는 최선을 다하면 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첫 시간 국어를, 대충 풀었어요. 아니, 아깝게 떨어지기 위해 풀었지요.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점수를 맞추려 아는 문제도 몇개는 오답을 적었습니다.

영수 시험 시간엔 그냥 최선을 다한다기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풀구요. 

 

ㅎㅎㅎ 1차 필기시험 결과는 안봐도 넷플릭스죠. 

 

아버지의 삶과, 아버지보다 선배였던 외삼촌의 

군인으로서의 삶을 닮고 싶어했던 저는

 

우리 군이 저럴 수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크게 받아

모든 자극에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대입이고 뭐고 관심이 생기지를 않았어요.

 

그러다가 어찌어찌 대학이라고 들어가서

4월 19일의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겪고....5월이 되어 중간고사를 치르며

학교 게시판 곳곳에 붙여진 대자보의 사진들, 글들을 봤죠. 

분노는 더 끓어오르는데, 마음은 더 차가와지더군요. 

 

비겁했어요. 

같이 어깨를 곁고 나서야 했고, 보도블록을 깨야 했는데

저는 그러지 않았지요. 

 

그게 창피합니다. 

 

그렇게 방관자처럼 지내다가, 

여느 때처럼 시위가 있어서 시끄럽던 날, 당시 여친과 만나 시위때문에 제 학교 앞은 시끄러워서

다른 동네로 술마시러 가려고 전철역으로 내려가는데, 

길 옆에 주르르 서 있던 전경들의 닭장차에, 얼굴만 아는 정말 가녀린 스웨덴어과인지 네덜란드어과 인지....

시위에 참여했던 여학우 한명이 백골단에게 잡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끌려들어가고,

맨 뒷자리에 던져지듯 앉혀지자마자, 닭장차 커튼이 창문을 다 가리는 걸 보고

여친을 먼저 보내고, 전철역 구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구차하고 창피해서요. 

 

기술선생님의 '힘들었다'는 말. 

그 당시 제가 읽었던 신문에 오른 '풍문'들

이름도 모르지만, 같은 공간에서 공부했던 

그 뽀얗고 고왔던 학우의 공포에 질린 눈빛. 

비겁했던 저의 순간들.

 

그것들이, 

저를 변절하지 못하게 합니다. 

 

광주의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과, 

언제나 옆에 같이 서 있겠다는 말씀 올립니다. 

 

지치지 않겠습니다. 

 

 

'Black' 님의 글을 옮겨 왔습니다.

.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