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스페인 26

이강인이 스페인으로 축구 유학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이강인, 인천 떠나 스페인 갈 수 밖에 없었던 사연있다” 당시 이강인 선수는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클럽에서 이미 같은 나이 선수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 실력이었고, 최 감독은 이강인 선수 발전을 위해 월반을 요청했다. 최 감독은 이 과정에서 이강인 선수가 인천을 떠나 스페인 축구 유학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고 밝혔다. 최 감독은 “당시 강인이 실력은 1~2살 위의 형들과 붙어도 전혀 밀리지 않아서 월반을 추천했는데 우리나라 체육계 시스템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스페인에서도 충분히 통할 실력이었지만, 그렇게 급하게 떠났어야 했던 이유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당시 최 감독은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클럽 취미반을 담당하고 있었다. 취미반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 운영하며, 4학년에 진학..

[스페인 13] 베네딕토 수도회의 '몬세라트 수도원' .....

9세기에 처음 알려진 수도원은 이후 증개축되었지만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상당한 부분이 파손되었고 수도사들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후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야 다시 재건에 들어가고 수도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들어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지금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약 8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는 13세기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이자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와 카탈루냐의 성인인 ‘검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다. 대성당 정면의 파사드는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예수님과 12제자를 조각해 놓았는데 원래는 은으로 세공된 파사드였지만 1900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

[스페인 12]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큰 감명을 받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가 바르셀로나만의 대성당을 짓자는 운동을 벌여 시민 모금이 시작되었다.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F. de P. Villar)가 좋은 뜻에 동참하여 무보수로 성당 건설을 시작했지만 무조건 싸게 지으려고만 하는 교구에 질려 1년 만에 포기하고 자신의 제자였던 가우디를 후임자로 추천하였다. 젊은 건축가에게 맡기면 공사비를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교구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는데, 그는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면서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43년간 이 공사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쳤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 직접 인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설계..

[스페인 11] 몬주익에 자리한 올림픽 주경기장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건 곳이 바로 이곳 몬주익에 자리한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 25회 하계올림픽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새로운 나라들이 대거 첫 출전하면서 169개국, 9000여 명이나 참가하여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주경기장 앞에는 2001년 바르셀로나 시와 경기도가 공동으로 세운 황영조 선수 기념비가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특별함이 더해지는 곳이다. 32개 종목에 모두 257개의 금메달을 놓고 실력을 겨루어 구 소련의 연방 공화국 단합팀인 독립국가연합이 45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종합 우승을 차지하였다. https://www.youtube..

[스페인 10] 세비야 공연장에서 '플라멩코 쇼' .....

70유로를 가이드에게 내고 들어간 공연장 맨 앞줄이 아니어서 아랫부분 발 움직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으며 공연 중반까지는 촬영금지라며 단속을 하기에 어쩔수 없이 구경만 했다. 그런데 공연 후반쯤에 갑자기 동영상 촬영을 허락하니 찍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홍보효과를 노리는 것이리라. 솜씨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볼 만하니 '플라멩코 춤'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동영상을 직접 보시기 바란다. 플라멩코가 예술 퍼포먼스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카페 칸탄테(cafe cantante) 라고 불리는 음악 카페들에서의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19세기 후반은 플라멩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인기가 크게 사그라들었다. 1930년대 이..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