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보따리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생생한 6.25 경험 ..... 할아버지와의 대화

딸랑이* 2023. 6. 2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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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당시, 내가 11살이었어.

 

우리집이 노량진에 있었는데, 산 쪽 높은 곳에 있었어.

 

요즘으로 치면 한강 전망이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었지.

 

우리 집에서 그 한강 다리가 보였던 거야.

 

폭파는 6월 28일 새벽 두시인가 세시에 터졌어.

 

자다가 엄청난 굉음이 들렸어.

 

그 폭발이 얼마나 셌느냐 하면, 

 

그 폭발의 진동과 열기가 집까지 훅 밀고 들어 왔어.

 

선반에 있던 물건이나 식기류등은 다 떨어지면서 나뒹굴고 난리가 났지.

 

그 열기가 뜨거우니까 우리 어머니가 우리 삼남매를 모두 감싸안고 이불 안에 들어갔어.

 

그런데 그 꼬맹이들이 가만히 있겠냐, 

 

내 동생이 5살, 2살이었으니 나가려고 하던걸 어머니와 내가 막았지.

 

어느정도 열기가 지나가고 나서 한강을 봤어.

 

다리가 끊어지고 연기가 나는데, 

 

그 역사적인 광경을 내가 본거 아니겠느냐.

 

 

'그 때 당시, 라디오나 신문같은 걸로 전쟁이 6월 25일에 났다는건 알고 있었어요?'

 

아이고 그런거 없었어. 적어도 우리 가족들한테는,

 

아무런것도 모른채 그냥 폭파가 일어난거야.

 

밖을 나와보니 그냥 난리통이야.

 

다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한다고 했어.

 

우리 아버지가 마포 경찰서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이 아버지가 당직을 서던 날이었어.

 

벌써 다리는 폭파 되었고, 피난을 가야한다고 난리가 났으니,

 

우리 어머니는 그냥 우리 셋을 데리고 피난을 가야하는 상황이었어.

 

그 때 당시 우리집이 그래도 다른 집에 비하면 사는 집이었어.

 

우리 어머니는 집안 살림중 괜찮은 것들을 동네 방공호 같은 곳에 옮겨놓았어.

 

무슨 정신이 있어서 그런건지, 그냥 정신 없이 무조건 넣은건지, 어쨌든..

 

그렇게 짐을 옮기다가 짐을 싸서 피난 인파에 이끌려 남쪽으로 내려간거야.

 

그런데 봐라,

 

막내 동생이 두살이니, 어머니가 업어야지,

 

홀몸으로 머리에 이고 가봤자 얼마나 챙기겠어.

 

나는 11살이고 동생은 5살인데 우리가 챙겨 가는 집이 한계가 있지.

 

 

'그럼 피난은 다 발로 걸어가는거에요?'

 

그렇지, 당연한거지.

 

운좋게 집에 소가 있다거나, 

 

하다못해 리어카라도 있는 집은 

 

짐 운송 수단이 될수는 있지만,

 

이동 수단은 그냥 걷는거였어.

 

이게 피난을 가는거였으니, 큰 도로로는 못가는거야.

 

적발될수 도 있으니까..

 

굽이굽이 산(관악산)을 돌아 간거나 좁은 길로 가야했어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 정문,

 

그 때 이름 자하동 그 쪽 개울을 지나서,

 

안양, 군포, 의왕, 수원 이렇게 지나서 

 

평택을 향해 간거야.

 

평택에 친정집이 있었거든.

 

우리 어머니가 엄청 고생했겠지..

 

피난 길이니까 이런 저런 소문이 들릴 것 아니냐?

 

서울, 특히 한강기준으로 북쪽에 있는 경찰들은 

 

이미 북한이랑 싸우다가 전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이악물고 우릴 데리고 계속 피난을 간거지.

 

밥은 구걸을 하던지 그렇게 먹었던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상상이 안돼...

 

그때 당시 내가 여름방학이고, 겨울방학이고, 

 

항상 외가댁에 놀러갔었어.

 

그래서 나도 그 서정리 역부터는 아는 길이었지.

 

용산이나 노량진역 그런데서 열차를 타서 서정리역에서 내려서 

 

철길 밑으로 쫙 도로가 있었어, 외가집까지.

 

그걸 따라서 10리, 1시간 이상을 걸으면 서탄면에 우리 외가집이 있었어,

 

그 당시 우리 외할아버지가 그 서탄면 면장이었어.

 

지금으로 치면 대농이야. 

 

대농의 지주였으니 부유한 사람이었지

 

대대로 농사 짓던 집안이었어.

 

거기 외동딸이 우리 어머니인거야.

 

'그러면, 그 외갓집 식구들은,

딸이 아이들 데리고 오는지도 몰랐겠네요? 전화도 없고..'

 

모르지~

전화가 어디있어 그 때 당시에..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서탄면으로 가기 위해 계속 걷고 걸어서 밤에 서정리 역에 도착했어

 

그때 열흘이 걸렸는지, 이십일이 걸렸는지 모르겠어.

 

할아버지 말을 듣고 추측해본 피난 경로. 60km가 넘는 거리

 

 

우리가 28일에 출발했으니, 아무튼 7월이었을거 아니냐,

 

얼마나 더웠겠어.

 

서정리 역에서 서탄면 까지 걸어가는데, 

 

벌써 밤이라서 중간에 오두막 같은 곳에서 자고 가기로 했어.

 

그때가 기억이나.

 

그 때 막 총알이 날아가고 불이나고.. 얼마나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었는지..

 

 

아 그런데, 트럭이 사람들을 잔뜩 싣고 막 지나가는데,

 

한대가 지나가고, 또 한대가 지나가고, 계속 차가 지나가는데,

 

처음 보는 깃발을 꼽고 다니더라고.

 

그 때 당시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

 

차에 탄 사람이 군인인지도 몰랐어.

 

 

그 사람들이 우리보고 막 뭐라고 하는데,

 

무서워서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감싸고 막 울고 그랬지.

 

해코지 하지는 않았어.

 

 

그렇게 무사히 날이 밝고 

 

더 걸어서 드디어 서탄면에 들어섰어.

 

논밭을 지나서 방앗간을 지나서 저만치 우리 외갓집이 보여.

 

 

그런데 거기 보니까 어제 봤던 그놈들이 그 깃발을 꼽고 보초를 서고 있는거야.

 

지금이야 그게 인공기인걸 알지만, 그 땐 몰랐지.

 

딱 가니까 그 보초 사는 사람이 

 

"뭐요!" 

 

이러는거야

 

"여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니 돌아가시오"

 

하니 우리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하지.

 

그러니까, 우리 외갓집이 면장이었으니까, 이 동네를 와서 여기를 먼저 접수한거야.

 

접수하고 그 동네의 본부를 만든거지. 

 

그 당시에 그런걸 보안사 라고 했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기진 맥진 할거 아니야.

 

주저 앉아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그 북한군은 계속 윽박지르고.

 

우리는 어머니 따라 다 울고불고.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이 나오는데..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팔에 빨간 완장을 차고 있었어.

 

 

그게 누군가 하니 방앗간에서 일하던 지서방이었어.

 

이름은 모르고 그냥 지서방 지서방 한거지.

 

그게 소위 말하는 지방 빨갱이라는 거야.

 

 

그 당시는 왜 저 사람이 빨간 완장을 찼으며, 왜 깃발이 꼽혀있는지 

 

아무것도 몰랐지. 나중에 깨우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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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마르크스파, 사회주의 하던 사람들이 북한군에 협력한건가요?'

 

아니 그 사람은 그런 위인이 못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북한군이 들이미니까 

 

살기위해서 살려주십시오. 

 

하던 사람들 중에 북한 군이 살려줘서 

 

그 동네 사정 파악할때 쓴거지. 

 

반동분자 누구누구 찍어라, 땅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찍어라. 이런거

 

그럴때 제일 먼저 물어보는게, 이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부자들을 지목하는거였어.

 

우리 외갓집이 대지주였으니까 우리집이 그렇게 된거지.

 

그냥 지서방은 무식한 일꾼이야 일꾼, 머슴. 북한군 입장에서는

 

아무튼 그 지서방이란 사람이 우리 어머니를 보더니,

 

아이고 누님, 이게 어떻게 된겁니까,

 

누님, 여기서 말하면 큰일 나니까, 아무말 말고 제 말 들으세요.

 

여기서 한 시간을 더 걸어가면 용솟마을이라고 있어요.

 

거길 가면 가족들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세요. 

 

 

지서방이란 사람이 그래도 어떻게 보면 우리한텐 은인이야.

 

다 숨겨주고 한거지.

 

 

그래서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또 한 시간을 걸어서 가야 했던거지.

 

 

그렇게 문을 열고 '나왔소' 하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게 어떻게 된거냐, 어서 들어와라' 하고

 

부둥켜 안고 운거야.

 

 

우리 삼남매도 덩달아 울었지.

 

우리 철부지가 뭘 알겠어.

 

어른들이 울면 따라서 울고

 

어른들이 웃으면 따라서 웃은거지...

 

 

그렇게 가족들을 만나게 되어서 어떻게 된건지,

 

저 깃발이 뭔지, 빨간 완장이 뭔지.

 

어떻게 우리 집이 빼앗겼는지 알게 된거야.

 

그렇게 7월달에 도착해서 여름 가을.. 그렇게 지내게 된거야

 

거기서 외갓집도 뭐가 있겠어..

 

쫓겨났으니까..

 

그래도 밭이나 이런데서 수확하는건 할수 있었나봐.

 

거리가 먼게 무슨 문제겠어

 

먹고 살아야하는데

 

1시간이든 2시간이든 

 

논 가서 쌀 털어서 가져오고 

 

밭에서 심은거 가져오고

 

그런식으로 겨울을 나게 된거야.

 

그렇게 친정집에 지내면서 내가 깨우치게 된거야

 

다리가 부서져서 아버지가 같이 피난 못온거구나,

 

경찰이라서 싸우다 죽었겠구나..

 

그렇게 12월까지 친정집에서 지내게 된거야.

 

그 와중에 9월엔 인천 상륙작전을 해서 

허리를 끊게 되었지.

 

그래서 밑에 내려 왔던 공산군들은 독 안의 쥐가 되는거지.

 

죽기 아님 살기로 다 지리산이나 기타 산으로 숨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최대한 발악하고 양민들을 다 쏴 죽이고 그랬어.

소를 뺏어서 잡아먹기도 하고.. 

 

아무튼 12월까지 북한군은 어느정도 잠잠해졌어.

 

우리 군이 쫙 밀고 오면서 숨어있는 공비를 다 토벌하는거지.

 

우리 군이 진격하면서 압록강 까지 닿기도 했었고.

 

 

그런 상황에서 어느날 단독군장을 한 경찰이 딱 마을에 나타나게 되는데...

 

 

소총을 매고 용솟마을에 등장한 그 경찰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던거야.

 

그 때 까지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총을 메고 딱 나타났으니, 어땠겠어.

 

외갓집이 난리가 났어.

 

얘기를 들어보니 그 당시 경찰 본부가 후암동에 있었는데, 다리가 끊어진 후

 

경찰들이 전부 집결해서 군인들하고 합류해서 북한군을 소탕하고 있었던 거야. 

 

특히 산에 숨은 북한군 진압은 군인보다 경찰들이 많이했어.

 

아버지가 경찰관이니까 밑에 까지 밀려 있었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쭉 밀고 올라왔던거지

 

군인들은 전선을 밀고 올라가고, 경찰들은 숨어들은 북한군을 소탕한거야.

 

그렇게 서울도 수복하고 쭉 올라갔다가, 임진강까지 올라갔었는데,

 

북한군이 이제 중국의 인해전술을 등에 엎고

 

다시 밀리게 된거야.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올라갔다가 다시 밀려 내려오면서 마침 평택쪽에 부대가 집결해서 하룻밤 묵게 되었던거야.

 

친정집이 여기에 있으니까 여기에 있을거라 생각하고 부대에 말을 하고 이 마을까지 오게 된거였어.

 

그 만난 순간 까지는 좋지만, 내일 아침에 또 가야한다는거야.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후퇴를 해야한다는거야.(1.4후퇴)

 

그런데 이미 마을에는 우리 어머니가 경찰 아내라는게 소문이 쫙 나버렸고,

 

북한군이 이 마을을 다시 점령하면 필히 죽게 될거라고 해서,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와 어머니를 데리고 기차역에 가게 되었어.

 

자리는 없지만, 지붕에 매달려서 갈수는 있었어.

 

그 때가 한 겨울인데 얼마나 춥겠어...

 

그 기차에서 살아남으면 사는 거고,

떨어지거나 얼어죽으면 그게 그 사람 운명인거야.

 

그래도 경찰 가족이라는 특혜 때문에 우리는 탈 수 있었어.

 

기차역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

 

수많은 인파가 우리도 태워달라고 아우성인데, 

 

우리는 그래도 지붕위에라도 탈 수 있었지 

 

그때 당시 증기기관 기차인데,

 

칙칙폭폭하면서 연기가 나오면 그게 수증기도 있어서 얼굴이나 손에 닿으면 그게 얼어붙어서 그렇게 추울수가 없어.

 

그리고 지붕이 편평한게 아니라 약간 아치형으로 되어있었어.

 

자다가 까딱하면 그냥 떨어져 죽는거야.

 

그리고 터널이라도 들어가봐,

 

매연이 그 터널안을 꽉채워서 숨도 쉬기 힘들었어.

 

 

추풍령 고개에 있는 터널, 그 터널이 그 당시 제일 긴 터널이었어.

 

그 추풍령 고개를 넘어가는데, 그 석탄으로 가는 기차가 그 힘으로 고개를 못 넘어 가는거야.

 

그런데 뒤에서는 또 다른 기차가 올 거 아니냐.

 

저 멀리서 기차가 와,

 

우리 기차에 있던 경찰이 빨리 내려서 손을 흔들고, 앞에 멈춰있다고 말을했어.

 

뒤에 있던 기차가 밀어서 같이 겨우 그 고개를 넘어갔어.

 

 

그 터널이 너무 낮아서, 터널에 들어가면 지붕에 있던 사람들은 그냥 엎드려 있어야 했어.

 

한번은 터널 안에서 물 같은 게 얼굴에 닿는데, 어두우니까 그냥 기차에서 내뿜는 수증기인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사람 피가 튄거였어.

 

그러면 이제 아이고 아버지, 여보 이러면서 땅에 떨어진 가족들 이름 부르면서 통곡을 하고 그랬어.

 

그런게 두 번 세번 반복되면 얼굴에 뭔가가 튀었을 땐 이제 '아 또 누군가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렇게 김천에 왔는데,

 

'이제부턴 작전지역이어서 더이상 피난민들을 데려가지 못한다'고 해서 피난민 전부가 다 내릴 수 밖에 없었어.

 

기차에사 피난민만 내려놓고, 

 

기차안에 있던 아버지랑 말 한마디 못나누고 그냥 기차는 그렇게 떠났어.

 

그렇게 1월4일에 김천에 떨어졌으니,

 

날씨가 얼마나 춥겠어.

 

그때 옷이라도 두껍겠어?

 

(대화할 당시 할아버지가 입고 있던 츄리닝 바지를 가리키며) 이거?

 

그 당시 이 정도 옷만 있었어도 죽을 사람 여럿 살았을 거야.

 

 

아무튼 김천역에 그렇게 뚝 떨어졌으니 어떻게 하냐,

 

우리만 있는게 아니라 수많은 난민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

 

우리는 엉엉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가자고 했어.

 

그리곤 우리 어머니가 어떤 아줌마를 만나서 그 아줌마가 우릴 어디로 인도해줬어.

 

그 아줌마를 어떻게 만나서 왜 우리한테 잘 해줬는지는, 난 모르겠어.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그저 천우신조리고 하면서 '하늘이 우릴 도왔다'라고만 하셨어

 

 

아무튼 그렇게 그 아줌마를 따라 가보니 일본식 건물이 있었어.

 

그런걸 적산가옥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집을 지을 때, 

섬나라라서 습기가 차고,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땅하고 마루하고 그 높이 차이가 꽤나 높아. 

 

설 수는 없지만 고개를 숙이고 걸어 다닐수는 있어.

 

그 아줌마는 우리에게 저기 마루 밑에, 

우리 네가족이 있을만한 자리가 하나 있으니까, 그쪽에서 지내라고 했어.

 

추위는 면할수 있을거라고.

 

진짜로 가보니까 거기 피난민들이 쫙 깔려있어.

 

 

마루 위에 집안에도 사람이 있어.

 

그 사람들은 먼저 온 사람들이지.

 

아무튼 우리는 그 마루밑에 자리를 잡게 되었어.

 

그런데 바람만 피할뿐이지 얼마나 습하고 냄새나고 춥겠어.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야.

 

김천내려올 때 우리 어머니가 이불을 짊어지고 와서 그걸 덮고 밤을 지냈어.

 

그리고 날이 밝고 배가 너무 고픈데
 
옆을 보니까 사람들이 깡통에다가 줄을 달아서 나가는거야.
 
 
그게 뭐겠어.
 
구걸하러 다닌거야.
 
나도 그때 어렸지만 철이 일찍 들었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내가 나서서 그렇게 구걸하러 나갔어.
 
 
"저, 피난민인데 조금만 도와주십쇼."
 
 
이렇게 이집 저집 다니면서 한 숟갈씩 받아서 온가족이 나눠 먹었던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어머니가 부농의 딸이었는데 그렇게 이 악물고 구걸을 하러 다녔었어..
 
 
 
밤에는 마루 밑이 어두우니까 어떻게 했느냐,
 
폐전기줄을 주워와가지고,
 
기둥 끝과 끝에 못으로 박고, 불을 붙이잖아?
 
그러면 천천히 촛불처럼 끝에서 끝으로 불 빛을 비추는거야.
 
그러면 얼굴 겨우 알아볼 정도의 희미하게 불빛이 나는거야.
 
그런데 그 피복은 나이롱이나 그럴거 아니냐?
 
그게 일자로 천천히 타면서 촛농처럼 뚝뚝 떨어지는데, 그게 살에 떨어지면 따끔 따끔 뜨겁고
 
이불에 떨어지면 이불에 구멍이 나고 그랬어.
 
 
(사실 이 부분은 잘 이해가 안갔다. 
전기줄을 팽팽하게 벽에 메달고 안쪽을 태우면, 촛불처럼 겉에 피복이 연소하고, 
안에 전선이 초의 심지 역할을 하는거 같은데, 그냥 그려러니 하고 들었다)
 
 
그렇게 2-3개월을 지냈어.
 
그러다가 우리 어머니가 김천옥이라는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었어.
 
설거지를 한다건가 그런거지.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음식점에서 남은 음식을 싸오고 그랬어.
 
지금껏 구걸만 하다가, 완전히 이건 진수성찬이지.
 
옆에선 다들 부러워 하고. 
 
나눠 주기도 했어.
 
갑자기 부자가 된거야.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어. 부자가 되었다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피난 온 형 중에 한명이 꽈배기를 들고 다니면서 파는 일을 소개시켜주었어.
 
나이 12살에 '꽈배기 사세요!' 하면서 김천역에서 그렇게 하게 된거야.
 
 
그런데 그 형이 어느날부터 안보이더라고.
 
형이 나한테 와서는 "야 너도 이거 때려치우고 나처럼 신문돌려!"
 
라고 하게 되어서 나도 신문을 돌리게 되었어.
 
신문 무게가 제법 나가잖아.
 
내가 들어봤자 얼마나 들겠어.
 
아마 기껏해봐야 100부는 못 들었을거야.
 
 
 
그 형을 내가 잘 만났어.
 
자기 관할 지역중 일부를 나한테 준거야.
 
"여기 여기 집 갔다 주면 된다."
 
이렇게 알려주고,
 
 
 
그러다가 이제 일이 어느정도 익숙해 지니까,
 
신문을 더 받아서 돌아다니면서 신문 파는 일도 하라고 했어.
 
'내일 아침 경향신문! 영남일보!'
 
이러면서..
 
그렇게 집집마다 돌리고, 연 근처에서 신문도 팔고.
 
 
 
그러니까 우리가 갑자기 윤택해진거야.
 
나는 나름대로 신문 팔아서 돈 벌어오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고.
 
 
 '그때까지 그러면 아직 그 밑에서 산거에요?'
 
 
그렇지, 집을 어떻게 구해.
 
먹는 것 정도만 좀 나아졌다는 거야.
 
 
 
 
 
그렇게 점점 신문 돌리는 영역을 늘려갔어.
 
이 동네 돌리고, 신문사 들러서 또 받아서 다른 동네 돌리고..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신문을 돌리고 중앙 국민학교 옆을 지나는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밖 지붕만 있는 건물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거야.
 
그러니까 나도 오다 가다 지나가면서 수업하는 걸 볼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내가 그 당시 저길 가면 뭔가 배울 수 있겠다 싶었어.
 
 
그래서 신문 다 돌리고 맨 뒤 빈 자리에 슬그머니 앉은거야.
 
앉아가지고 옆에 앉은 놈 책 훔쳐보면서 그렇게 수업을 들었어.
 
선생은 알면서도 모르는척 해주는 거야.
 
 
그리고 다음날은 연필이랑 종이를 챙겨가지고 또 그렇게 도둑수업을 들었어
 
그렇게 일주일인가, 이 주일이 지났어.
 
선생도 기특하게 생각했을거 아냐,
 
하루는 나에게 와가지고,
 
"야 이놈아 너 계속 오는데, 너 어떻게 왔어?"
 
'저 서울에서 피난 왔습니다'
 
"너 몇학년이야"
 
'4학년입니다'
 
"왜 왔어?"
 
'공부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기특하다면서 교과서를 줬어.
 
 
시험도 봤는데 아주 잘 본 기억이 있어.
 
그 당시, 이런 수업 이수했다는 종이 한장이라도 들고 서울로 갔어야 했는데, 
 
이걸 못가져 가서 서울로 올라가서 다시 4학년 수업을 들었어..
 
 
갑자기 서울을 가게 되서,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심지어 선생님한테 인사도 못드리고 올라가게 된거야
 
 
 
'왜 갑자기 서울을 가게 된거에요?'
 
 

내가 머무는 적산가옥 맞은 편에 집이 하나 있었어.

 

 

거기에 쪼그만 놈이 하나 있었어.

 

5,6살 정도 된 애야.

 

이름이 김지호. 

 

그 놈하고 어떻게 시작하게 된지 모르겠는데,

 

만날 때 마다 글자 연습을 많이 했어.

 

내가 지나가거나 신문을 돌릴 때 문패를 보게 되면 

 

'아저씨 저게 무슨 자에요?' 

 

라고 물으면서 한자를 외웠어.

 

그렇게 한자 공부를 혼자 했었는데

 

그 꼬마 애를 만나서 처음에 그 애 이름을 한자로 써 줬었나..

 

아무튼 걔를 만나면 그냥 흙바닥에 그렇게 글자를 쓰면서 놀았어.

 

날 잘 따르고 말도 잘 들어서 같이 자주 놀았어.

 

어느날 그 애 가 엄마! 하면서 달려가는데

 

쓱 보니까 앞집 아주머니야. 

 

그 애 엄마가 나를 보더니,

 

'얘, 너 이 앞에 사는 피난민이지?'

 

이런 얘기를 하다가 기특하다면서 하루는 집에 오라고 해서 밥을 해주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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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은 피난민이 아닌거에요?

 

아니야 그 집은 피난민집이 아니야. 진짜 집이었어.

 

나한테, 어디서 왔니? 가족들은 어디에 있니? 등등 을 물었어.

 

그래서 원래 서울에 살다가, 피난을 가고,

 

아버지가 경찰이라서 같이 내려오고....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는거야.

 

'너희 아버지가 경찰이니?'

 

'네..'

 

그렇게 밥을 먹고, 다음날.

 

 

어떤 높아보이는 경찰복을 한 아저씨가 

 

우리 어머니랑 얘기를 하는거야.

 

 

알고보니 그 꼬마애 아버지가 김천에서 경찰을 하고 있었어.

 

내가 자기 아들하고 잘 놀아주니까,

 

기특해서 도와주고 싶었나봐.

 

 

그래서 이런 저런 사정을 듣고 

 

그 분이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준다고 했어.

 

우리는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거든.

 

 

전화라는 거는 그 후로 10, 20년이나 지나야 가정집에 보급화 되었거든.

 

해봤자 경찰이나 정부기관 등이 겨우 갖고 있던 때야.

 

그 아저씨는 내 아버지는 지금 전투지역에 있어서 소식을 알기는 어렵고,

 

다른 가족들에 대해서 물어봤어.

 

 

내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가 용산 철도 공작청인가,

 

아무튼 서울에서 기차를 고치는 일을 하는 일종의 기술공무원이었어.

 

그 얘기를 들은 그 경찰관 아저씨가 

 

서울 용산 경찰서에 전화해서 

 

'이러이러한 가족이 현재 김천에 있는데,

 

용산철도청에 전화해서 손아무개씨 있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까?' 

 

뭐 이런식으로 물어봤을꺼야 아마.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연락이 닿아서,

 

그 경찰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말 한거지.

 

'당신 손자 손녀, 며느리가 여기서 이렇게 있다'

 

 

어떻게 보면, 천운이기도 하고,

 

경찰 가족이라 받은 특혜이기도 하지...

 

 

그래가지고 어느날 할아버지가 딱 기차를 타고 오신거야.

 

거기서 또 부둥켜 안고 난리가 났지...

 

소식도 몰랐는데 그 전쟁통에...

 

 

사실 그 당시 내 어머니가 병을 얻었었어.

 

해수병이라고 했나, 기관지 병이어서 숨을 가쁘게 쉬고 기침을 계속 했지.

 

그렇게 아픈 데도 계속 일을 한거야.

 

 

할아버지가 그걸 보더니, 

 

지금이라도 당장 가자, 해서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가게 된거야.

 

 

그래도 그 당시 거기서 몇 개월을 살았는데 

 

제법 살림살이가 있을거 아니냐,

 

이불이라던가 뭔든간에.

 

그런걸 이제 다 주변 피난민들에게 나눠주고 

 

기차역으로 향했어.

 

할아버지가 철도 공무원이니까 우리도 공짜로 탈 수 있었어.

 

김천 내려올 때는 지붕에 메달려서 죽지 않고 내려온게 다행이었는데..

 

서울 올라갈 때는 딱 좋은 자리 앉아서 가게 된거야..

 

감회가 새로워서 눈물이 났어.

 

어머니는 계속 기침을 했던 기억이 나네.

 

 

그렇게 서울에 올라왔는데

 

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는거야.

 

너희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으니 내 집에서 머물자.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니 노량진에 저희 집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지.

 

 

그 당시 우리 집에 약간 산 중턱에 있었어.

 

그당시 전투라는게 뭐겠어, 요점지를 점령하는거 아니겠느냐. 고지전.

 

 

우리집에 고지에 있었으니 완전 전투 지역이 되어서 그냥 아무것도 없는 폐가가 되어버린거야.

 

 

어머니는 그걸 확인하시더니, 겨울 동안은 친정에 있는 평택에서 다시 머물기로 결정했어.

 

 

'다시 평택이요? 그럼 애초에 김천에 내려갈 필요가 없었던거 아니에요?'

 

 

아니지. 1.4후퇴때 북한,중공군이 또 내려올거 아니냐.

 

처음에는 지서방이 몰래 우리 가족들을 빼 낸 덕에 무사했지만,

 

북한군이 또 내려오면 지역 빨갱이가 또 생길 수 밖에 없어.

 

누가 그 역할을 할 지 아무도 모르는거고.

 

경찰가족인게 마을에 소문이 퍼져서 

 

그 사실이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거라고 생각해서 내려간거였지.

 

 

그 때가 11월이었어.

 

벌써 중공군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을 때야.

 

아무튼 그렇게 평택에서 겨울을 나고,

 

52년 2월인가 3월에 다시 서울을 올라와서 할아버지 집에 머물게 되었지.

 

학교를 가려고 했더니 

 

다시 4학년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그 당시 원래대로라면 내가 13살, 6학년인데

 

다시 4학년을 가라고 했어.

 

그 국민학교(동작구에 있는 현 강남초등학교)가 나름 전통과 역사가 있는 국민학교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교칙을 들먹이면서 절대로 안된다고 했어.

 

 

그래서 전쟁 중에 개교한 본동초등학교로 가서 다시 물어봤어,

 

나는 6학년 수업도 따라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6학년으로 받아달라고 했는데

 

6학년은 힘들고, 5학년으로 받아 줄수 있다고 하더라고.

 

어쩔수 없이 거기라도 들어가는게 나은 상황이었지.

 

그렇게 전학을 가게 되었어.

 

 

그 때 당시 그렇게 밀려서 복학한 학생들이 엄청 많았겠네요?

 

그럼, 많지.

 

아무튼 그 당시 내가 김천에서 수업 받은걸 어떻게 증명할 종이라도 있으면

 

6학년에 갈 수 있었는데 아쉽지.

 

 

아무튼 새로 개교한 학교니까 이렇게라도 날 받아준거야.

 

내가 본동 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야.

 

(본동 초등학교 홈페이지를 보니 48년 개교 했다가 폐교하고 다시 51년에 개교했다고 한다.)

 

 

'아.. 그럼 그 때 까지도 아버지는 계속 산에서 북한군 소탕하고 다닌거에요?'

 

아니지, 방금 얘기는 아버지 오고 나서 있었던 문제고,

 

그 전에 또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우리가 서울로 올라오고, 다른 경찰들도 하나 둘씩 소탕을 마무리 하고 서울로 올라왔어.

 

우리 어머니도 불안하시니까, 경찰서에 계속 물어봐도,

 

곧 올거다, 곧 올거다 하고 오지를 않으시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가 '왜 우리 아들만 안오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굿을 해야겠다고 했어.

 

 

작은 아버지 아는 사람중에 박수무당이 있었어.(남자무당)

 

그렇게 우리 집에 큰 상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3일을 철야로 굿을 시작했어.

 

꽹가리 치고 북을 치고 난리가 난거지.

 

동네 사람들이 밤새도록 구경을 하는거야.

 

왜냐면 하루밤 지나면 그 떡 같은걸 나눠주고 새로 음식을 올리거든.

 

동네 사람들이 그거 받아 가려고 계속 구경하는거지.

 

 

그런데 2박 째, 3일로 넘어가는 자정 쯔음.

 

박수무당이 춤추면 이러더래.

 

'야야 아무걱정 말아라.

오늘밤 아니면 내일 아침 이 집 대주(무당이, 굿하는 집의 바깥주인을 이르는 말.)가

집에 오리라. 걱정 말아라. 더 빌어라. 더 빌어라..'

 

이 말을 계속 반복하는거야.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쌈짓돈 꺼내고..

 

할머니도 싹싹 빌고

 

 

원래 무당들이 굿 끝날 때 쯤에 그렇게 얘기해.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3일째 아침 해가 밝아 올때,

 

굿이 한창중인 집에

 

아버지가 총을 딱 매고 대문을 딱 열고 들어오는거야.

 

 

내가 영화 각본을 쓰라고 해도 이렇게는 못 쓸꺼야..

 

그렇게 아버지가 들어와서 가족들이 다들 반기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놀랐지.

 

이 이야기가 한동안 마을에서 꽤나 유명해서 덩달아 그 무당도 유명해 졌어.

 

 

아무튼 그 때 나도 아버지~ 하면서 안기고, 

 

아버지가 배낭을 풀어서 물건들을 꺼내는데,

 

거기에 나 쓰라고 사온 공책이랑 연필이랑 그런게 있었던 거야.

 

그걸로 열심히 공부했지.

 

 

할아버지와의 대화 - 생생한 6.25 경험 

 

끝.

 

'봄은 있었다' 님의 글과 사진을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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