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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 때 10족 까지 모두 처형했던 사건 .....

딸랑이* 2022. 3. 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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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1360년 5월 2일,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명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주체는 아직 코흘리개 어린아이였기에 별 공로가 없었다. 

 

하지만 1370년, 홍무제가 아들과 손자들을 변방 지대의 번왕(藩王)으로 책봉하면서 주체를 연왕(燕王)으로 

 

북평을 다스리게 한 이후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398년에 홍무제가 사망하고 그의 맏아들 주표의 맏아들인 주윤문이 2대 황제(건문제)로 즉위하자 

 

곧바로 연왕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연왕 주체는 1399년, 조카에 맞서 거병한다. 

 

북평의 군대는 정예병이었으나 수도 남경의 황제군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다. 

 

그래서 연왕 측이 크게 패하고 연왕조차 죽거나 사로잡힐 위험에 빠진 경우도 있었지만,

 

 건문제가 “숙부님의 생명까지 위협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마라”며

 

제동을 거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반면 연왕은 자신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졌던 영왕 주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함께 조카를 노렸다.

 

 두 세력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은 마침내 1402년 6월, 

 

정예병만을 추려 남경을 전격 습격한 연왕의 필사적인 도박이 성공을 거두어

 

남경이 연왕군에게 함락됨으로써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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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에 입성한 연왕은 사흘 동안 궁궐 안을 이 잡듯 뒤지며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신하들을 숱하게 죽였다.

 

연왕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앞장섰던 제태와 황자징은 눈앞에서 사지를 찢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건문제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함락 당시 일어난 불에 타 죽었다고 했지만, 시체를 끝내 찾지 못했다. 

 

꺼림칙함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연왕은 건문제를 찾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정화의 대원정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연왕은 건문제의 스승이며 연왕 제거론의 주역이기도 했던 방효유만은 살려두었고, 

 

옥에 가두기는 했어도 정중하게 대접했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 받고 있었기 때문에 

 

회유하여 자신의 통치를 선전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마침내 옥좌에 앉은 연왕, 영락제는 방효유를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지필묵을 주면서 자신의 즉위 조서를 쓰도록 부드러운 말로 권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방효유는 순순히 붓을 들었다. 그리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락제가 지은 득의의 웃음은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방효유가 쓴 글은 단 네 글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의 도적놈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락제는 소리질렀다. 

 

“네가 정녕 구족을 멸해야 말을 듣겠느냐?” 방효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맞받았다.

 

 “구족(九族)이 아니라 십족(十族)을 멸한다 해도 역적과 손잡을 수는 없다!”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방효유의 입을 찢어버리라고 명령했다. 

 

리고 방효유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을 뿐 아니라, 정말로 십족을 멸했다. 

 

구족이란 자신을 기준으로 위로 사대, 아래로 사대를 가리킨다. 

 

구족을 멸한다면 그야말로 일가친척 피붙이는 남김없이 몰살시키게 된다.역적은 구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이리 저리 안 걸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실제로 구족을 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문자 그대로 구족을 멸했을 뿐 아니라 혈연관계가 아닌 제자, 친구, 선후배 등

 

방효유와 친분관계가 있다 싶은 사람도

 

 ‘열 번째 일족’이라 하여 모조리 처형장으로 보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벌이었다.

 

 이후에도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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