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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구 밀도를 가진 홍콩의 구룡성채 .....

딸랑이* 2022. 8.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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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구룡성채의 항공 사진

이때만 해도 고층건물이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솟아 있었다.

 

1993년의 구룡성채의 항공 사진

20년만에 엄청나게 발전(?)한 모습을 알수있다.

 

구룡성채 길거리 사이로 보이는 비행기

한때 이 빽빽한 건물 사이로 비행기가 보이는 광경은

미디어 속의 홍콩을 묘사할 때 거의 필수로 나오는 클리셰였다.

근처에 카이탁 국제공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룡성채를 축소해서 만든 미니어처

 

원래 구룡성채는 청나라가 영국을 막는 국경 요새였으나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간 뒤

이곳만 청나라의 영토로 남아서 치안권이 붕뜬 치외법권이 되었고

그 결과 난민과 범죄조직(삼합회)이 자리를 잡아서 외지인이 발을 들여놓으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는 홍콩의 마굴이었다.

 

"아편굴 투성이에 더럽고 쥐가 득실거리고 치외법권이며 무척 위험하죠. 홍콩의 sin city에요"

-1990년 아비정전을 구룡성채에서 촬영했던 양조위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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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성채 바로 옆에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이 있어 주변의 건물은 6층 이상 짓지 못하게 하는

규제가 있었지만 치외법권이었던 구룡성채는 이러한 법률을 무시하고 최고 15층까지 올라가게 된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구룡성채는 위에 언급했던 것 처럼 청나라의 영토였기때문에 홍콩의 공권력이 손이 닿지 않았다.

기어이는 수배범 등의 범죄자들도 성채에 들어왔고 결국 이곳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집단은 삼합회가 된다.

그야말로 삼합회의 말이 구룡성채의 법이었지만 1974년까지 지배하다가 홍콩경찰이 대테러부대 등을 동원한

대규모 검거작전을 전개해 삼합회는 쫓겨났다.

 

두려운 삼합회가 쫓겨난 후, 성채는 무질서한 팽창을 겪게 된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중국에서 넘어온 밀입국자의 수는 늘고...

이런 사람들이 늘자 성채가 기형적으로 성장해 골목은 마구 꼬이고

무분별한 증축으로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전등을 켜고 살아야 했다.

당연히 쓰레기가 널려있고 복도에는 살찐 쥐들과 바퀴벌레가 득실거렸으며

홍콩인들은 더럽고 위험한 곳이라며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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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구룡성채도 결국은 사람사는 동네였다.

그 험한 동네에서도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으며,

성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학교나 양로원도 있었고

이발소나 식당들도 많았다. (맛집이 많았다는 소문도...)

심지어 성채내엔 공장도 많았는데 시내에 내다 팔 에그타르트나

딤섬,장난감 등등 종류도 다양했고 마약소굴,매춘골목,야매의사등이

몰려있는 "악의 소굴"이었지만 그 속에도 보통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1987년 더 이상 방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국,영국,홍콩의 정부는

추가 논의 끝에 구룡성채의 철거를 발표했고

1991년부터 구룡성채에 살던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 때 성채 주민들과 보상금 문제로 마찰이 빚어졌으나 너무 슬럼화된 곳이라

사실상 부동산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여 미미한 보상이 주어졌다.

철거는 1993년 3월에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악명 높던 구룡성채의 주택가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홍콩 정부는 이곳을 구룡채성공원으로 조성했다.

현재는 구룡성채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구룡성채의 인구밀도는 1,900,000명/㎢ 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구 밀도를 가진 곳이었다.

참고로 1,900,000명/㎢의 인구밀도면 전세계 모든 사람을 제주도 2개 면적에 몰아 넣을 수 있는

미친 인구밀도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더럽고 위험하고 범죄가 난무하는 치외법권이었던 구룡성채는

사이버펑크에 큰 영향과 게임,애니메이션 등에 많은 예술적 요소의 영감이 되었고

수많은 대중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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