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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당파 싸움만 하다 피해를 입었나? ..... 임진왜란 관련 논란과 사실

딸랑이* 2024. 10. 17.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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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첫 전투, 부산진 전투를 그린 '부산진순절도'

 

1. 정말로 임진왜란은 조정이 대비없이 당파싸움만 열중하다 큰 피해를 입은 것인가?

 

파벌없는 정치구도란 동서고금에 없다. 그리고 대비를 했다. 이순신과 권율 등 유능한 장수들을 발탁해 주요 직책을 맡기고

변경의 방어 시설들도 개 · 보수 하고, 그 외 평판이 좋았던 장수들도 부산 전방에 배치시키는 등 나름대로 전란에 대비했다.

문제는 그 정도를 '왜구 수천 - 만여 명' 정도가 조선 변경의 해안가들만 어지럽히는 '왜변' 수준으로만 인식한 것이지,

'정규군 수십만' 이 양 국가간의 운명을 걸고 감행해오는 '전면전' 이 될 줄은 몰랐던 것...

 

황진(좌) 과/와 김덕령(우)

 

2. 조선에서 저평가 된 대표인물? 고평가 된 대표인물?

 

먼저 저평가 된 인물은 당연히 '황진' 을 꼽을 수 있겠다. 사실 황진은 임진왜란사 뿐만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따져서도

일대의 명장 반열에도 들 수 있는 활약들을 펼쳤다. 웅치(안덕원)전투와 이치전투의 승리로 호남의 육상 방어선을 지켰고

죽산에서부터 상주 일대까지 일본 제 5군을 연파하며 호서권을 회복, 일본의 보급난을 유발해 한양 철수에도 일조했으며

중과부적의 상황을 극복하진 못했으나 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분투하며 일본 전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조익, 『포저집』 35권, 「충청도병마절도사 황공의 행장」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위대기(魏大奇),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고개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조위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 라고 썼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경성(京城)에서 적이 퇴각하자 공이 적의 뒤를 추격하였는데, 상주(尙州)의 적암(赤巖)에 이르러 적과 전투를 벌여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국조인물고』 54권,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7번째 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다음으로 고평가 된 인물은 김덕령이다. 일대의 문무를 겸비했다고 알려진 소문과는 다르게 실질적인 공적은 얼마 없다.

실제로 공적이라 할 수 있을 법한 건 아래 기사가 전부이다. 그리고 군율을 과도하게 집행해 빈축을 사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군졸들을 폭행하고 살인을 저지른 적이 많았음에도 오히려 선조는 알려진 그의 능력이 아까워 두둔했다.

결국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고 나서야 참형될 수밖에 없었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馳啓)하였다.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2일, 정축 3번째 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 김덕령의 행보에 대한 조정의 평가 *

 

 

"김덕령(金德齡)이 살인한 일은 극히 놀라운 일이니, 대간이 논한 바가 극히 타당한 것으로 국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적의 진퇴를 아직 알 수 없고 나라의 성패 또한 헤아릴 수 없는 터인데, 이 때를 당해 하나의 장사(壯士)라도 잃는 것은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법을 맡은 관원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특별히 정국(停鞫)을 허락하고 형틀을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소서. 이것이 사람을 쓰는 활법(活法)인 것입니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덕령은 놓아줄 수 없는 중죄인이거니와, 일찍이 털끝만한 공로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를 완전히 석방하여 무장들의 방자한 습성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폐단이 장차 사람의 목숨 보기를 초개같이 여기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덕령의 살인은 실로 놀라운 일인데, 주현(州縣)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피살된 집 또한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 내려간 후에 비로소 계문(啓聞)하였으니, 방백(方伯)이 있다 할 수 있으며, 어사(御史)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대간은 의당 먼저 이들은 탄핵하여야 옳을 것이다."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7일, 갑신 2번째 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 당시 의병장의 기록 *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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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징비록' 중에서

 

3. 김명원의 책임 회피로 육상전 최초의 승전 장수인 신각이 처형?

 

정확히는 정보 혼선이다. 퇴각 후 임진강에 방어선을 형성하려 했던 김명원은 신각과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이후 임시절차에 따라서 탈영으로 선조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지속되는 패전으로 탈영병들이 속출하자

선조는 정보가 제대로 파악되기도 전, 급발진하는 바람에 군기를 잡는답시고 신각의 처형 명령을 내린다.

 

그러니까 딱히 김명원이 누명을 씌운 건 아니다. 어쨌든 이것 때문인지, 훗날 이순신이 압송될 때 김명원은

정탁, 이원익, 권율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하며 그의 사형을 막아내게 된다.

 

KBS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4.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본군 최고의 명장이다?

 

절대 ㄴㄴ, 임진왜란에 참전했었던 다른 다이묘들의 석고와 비교해보면 급이 한참 낮고도 낮은 다이묘다.

그럼 히데요시는 '왜 이런 놈을 그 중요한 한산해전에서 이순신과 맞붙게 하였는가?' 라는 의문이 들 텐데...

바로 모두가 아는 용인전투 승리 당시 '1,600 VS 5만' 의 절대적 수치를 히데요시도 곧이 곧대로 믿었던 것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형사고를 친 초특급 유망주' 라고 생각할 수밖에...

 

명군 기병대의 무장 모습을 그려낸 회화

 

5. 명나라는 민폐만 끼치고 실상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탈환, 정유재란 때는 직산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의 활약들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당시 명은 최소 11만 - 최대 15만에 이르는 대규모 전투병을 파병해 그 압도적 체급을 바탕으로

남해안 일대 왜성들에 웅거하는 일본군들이 더 이상의 북상을 하지 못하도록 찍어누르며 전장의 확대를 막았다.

또한 전란 당시 편곤 등의 무기 체계와 '원앙진' 에서 기초한 전투병 분업화 방안들을 조선에 전해주기도 했으며

전쟁 전후 기근에 휩싸인 조선에 대규모로 식량을 지원해주기도 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도 많이 줬다.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小米) 백여만 석을 우리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 · 전주 · 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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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좌) 과/와 권율(우)

 

6. 이순신의 출전명령 거부를 권율이 악의적으로 보고한 게 백의종군의 발단?

 

정유재란 초기, 권율이 왕명에 따라 부산포로 출전하지 않은 이순신을 괘씸히 여겼기에 이것을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이게 원균의 모함에도 힘입어서 결국 백의종군을 촉발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당시 이순신도 부산포로 출전했었고

해류와 기상 변동 상황들, 연이어 정박하는 일본 군선들로 부산포에서의 전면전과 상륙이 어렵다고 보고했을 뿐이다.

권율 또한 최전선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았기에 이순신에게 전해들은 대로 똑같이 이 보고문 그대로 올렸을 뿐...

 

그러나 원균의 모함 + 선조 개인의 심술로 이 보고를 작의적으로 해석한 게 그냥 이순신 압송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결과가 어찌됐든 결론은... 악의적으로 권율이 이순신의 상황을 보고한 게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앞선 사례에서 말했듯 정탁, 이원익, 김명원과 함께 이순신 구명에 앞장섰던 게 권율이다.

(심지어는 그 선조 특유의 변덕 때문에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도 그를 손절한 상황...)

 

7.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전력은 비정예 인원이다?

- 고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 ???????? -

 

전국시대 제일의 모신(謀神, 모략의 신)이자 서일본 최고의 다이묘인 '모리 모토나리' 의 아들

"서쪽은 (고바야카와)타카카게에게, 동쪽은 (도쿠가와)이에야스에게 맡기면 걱정할 것이 없다."
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능력을 평가, 전국시대를 통틀어서도 최고 지장의 반열로도 평가

-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 ???????? -

 

류조지 가문의 가신에서 실질적인 다이묘의 위치에까지 이를 정도로 지략이 뛰어난 인물
시마즈가 손절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협력하며 규슈 평정을 도운 '규슈 제일의 지장'

-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 ???????? -

 

이순신의 대표적인 경험치 셔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만능형 무장

탁월한 정무적 식견을 갖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언을 받들 정도로 주요 중신 입지를 구축

-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 ???????? -

 

전국시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입하기 전까진 사실상 시고쿠를 통일시키며
'흔들림 없는 시고쿠의 패자' 로 불리며 막강한 일대 영향력을 행사한 거대 다이묘

-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 ???????? -

 

규슈 일대의 전역에서 활약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독자적인 다이묘로 인정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서국무쌍(西國無双)' 이라 극찬을 받은 당대의 최고 무사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 ???????? -

 

막부 체제 개막 이래로 전봉 경험이 전혀 없는 최고의 무장 명문가였던 시마즈가 제일의 무장

사실상 규슈의 통일을 목전에 두었던 '규슈의 패자' 이자 공식적인 시마즈가의 최고 실세 무장

세키가하라 전투 종반부에 '시마즈의 퇴각' 이란 희대의 탈출전 감행, 동군 진영 전체를 경악

 

 

사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 빼고 웬만한 당시 무장들은 다 왔다고 보면 된다. 정작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은

"관동으로 전봉된 이후의 영지들을 보살펴야 된다." 거니 "관동 일대 반란들을 진압해야 한다." 거니 변명하면서

어떻게든 참전 자체를 피했다. 결국 이 전쟁이 이득없고 의미없는 소모전인 것을 알았던 만큼 기피한 것...

 

그가 결국에 참전을 했더라도 남해안 전역은 이순신에게 틀어막히고 육상로도 조명연합군에 틀어막힌 상황이라서
언급했듯이 소모전 양상만 더 늘거나, 그의 특성상 참전 다이묘들의 반감을 이용해 전장 이탈을 조장했을 것이다.

 

* 뭐... 그래도 1군이 아니라 한다면... 오다 노부나가,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도 모두 환생시키라는 것인지...

* 일본 북동부를 제패한 독안룡(獨眼龍),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지정된 할당량 보다도 많은 수의 병력을 징발하며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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